ARTIST’S NOTE | 13
무한과 죽음의 첫기억
2019 노트에서 발췌
무한의 시작
내가 처음 ‘무한’을 생각했을 때는 아마 일곱 살 무렵이었다.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던 시절, 나는 흙을 파고, 떨어진 나뭇잎을 모으고, 그 사이를 기어 다니는 작은 생명들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흙을 파면 그 아래의 세계가 갑자기 드러났다. 눈에 보이지 않던 공간이 갈라지고, 그 속에 또 다른 층이 나타났다. 축축하고 차가운 흙의 냄새와,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부서져 내리는 감촉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 속은 내가 알던 마당과는 전혀 다른, 깊고 알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의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끝이 없을지도 모르는 세계’에 대한 첫 자각이었다.
그렇게 드러난 땅 속 세계에서, 나를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은 존재는 지렁이였다. 팔다리 없이도 묵묵히 어디론가 향하는 존재. 매끄럽고 분홍빛의 몸이 흙 위를 비집고 움직일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감탄을 느꼈다. 더군다나 몸을 위아래로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하는 그 움직임은 이상하리만치 경이로웠다.
나는 잎사귀 위에 지렁이를 올려 집으로 가지고 들어와 그 움직임을 따라 해보았다. 배가 쓸렸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던 기억이 난다.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움직이는 방식을 몸으로 흉내 내어 그 움직임을 성공적으로 재현해냈다는 기쁨에, 나는 부모님 앞에서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그 작고 단순한 생물이 어떻게 방향을 알고, 어떻게 움직이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 번, 오랫동안 마당을 뒤져가며 지렁이를 찾아 지켜보았다.
그 존재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오로지 몸의 반복적인 움직임만으로 세계를 뚫고 나아가는 듯했다. 그것은 멈춤이 없는, 그리고 형태가 사라져도 다시 이어질 것 같은 생명의 무한한 순환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 경험은 나에게 '한없이 작지만, 영원히 멈추지 않고 이어질 것 같은 움직임'으로 각인되었다.
세계는 거대하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손끝의 흙 속에서 이미 무한히 펼쳐져 있었다. 나 말고도 여기 안에 또 뭐가 더 숨어 있는 걸까하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것들, 아직 보지 못한 존재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어쩌면 그때 이미 ‘무한’이라는 개념 자체를 어렴풋이 궁금해했던 것 같다. 지상의 모든 사물을 통과하며 각도에 따라 그 형태를 수시로 바꾸는 그림자처럼, 이 세계의 모든 관계 역시 끝없이 변화하고 이어지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흙과 지렁이, 빛과 그림자, 숨결과 정적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은, 아직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나를 붙잡았다. 그것은 사고의 시작이자, 존재가 스스로를 감각하는 첫 경험이었다. 그때 나는 흐름이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세계는 거대하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손끝의 흙 속에서 이미 무한히 펼쳐져 있었다. 나 말고도 여기 안에 또 뭐가 더 숨어 있는 걸까하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것들, 아직 보지 못한 존재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어쩌면 그때 이미 ‘무한’이라는 개념 자체를 어렴풋이 궁금해했던 것 같다. 지상의 모든 사물을 통과하며 각도에 따라 그 형태를 수시로 바꾸는 그림자처럼, 이 세계의 모든 관계 역시 끝없이 변화하고 이어지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흙과 지렁이, 빛과 그림자, 숨결과 정적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은, 아직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나를 붙잡았다. 그것은 사고의 시작이자, 존재가 스스로를 감각하는 첫 경험이었다. 그때 나는 흐름이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죽음의 인식
‘죽음’을 처음으로 느낀 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그러나 그때의 경험은 슬픔이 아니라, 감각의 인상으로 다가왔다. 병원 복도의 냄새, 희미한 불빛, 공기의 무게, 그리고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들의 표정. 그 모든 장면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단어가 내 안에서 실제 의미를 가진 것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내 방 창문 너머 공터를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쓰러져 가는 나무 위에서 아침 햇살 속에 울던, 유난히 선명한 색의 새 한 마리. 그날의 공기는 이상할 만큼 밝았고, 시끄럽도록 살아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깨달았다. 죽음은 단지 사라짐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속이 갈라져 어두운 그림자를 품은 나무는 이미 쓰러져 있었지만, 그 위에 서 있던 생명은 여전히 아침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날의 시간이 그대로 나에게는 오롯이 기억된다.
그때의 나는 죽음이 ‘없어짐’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 멈추더라도 세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죽음은 부재가 아니라, 관계의 변화이자 상태의 변형이었다.
무한과 죽음 사이에서
무한은 ‘끝이 없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는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죽음은 ‘없어짐’이 아니라, 그 연결의 방식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 차이를 언어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몸으로 느꼈다. 손끝으로 흙을 파던 감각, 공터의 공기 속에서 울리던 새의 소리 — 그것들이 바로 세계의 구조를 인식하는 첫 기억이었다.
이후의 모든 사유는 아마 그때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때의 흙을 파고 있고, 여전히 그 나무 위에서 들리던 새소리를 듣고 있다. 다만 이제는 그것을 감각으로만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로서 바라본다. 무한은 하늘의 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발밑의 흙 속에서 일어나며, 죽음은 그 무한한 순환의 또 다른 형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순환 속에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지렁이는 이렇게 움직인데요
지렁이의 이동 방향과 목적지는 주로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반응(주성, Taxis)에 의해 결정됩니다.
1. 방향 결정 원리
- 빛 회피 (음성 주광성): 지렁이는 피부에 있는 감광 세포로 빛을 감지하며, 빛을 싫어하여 빛이 오는 쪽의 반대 방향(어두운 쪽)으로 이동합니다.
- 습한 곳 선호 (양성 주습성): 지렁이는 피부 호흡을 하므로 몸이 건조해지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따라서 습도가 높은 곳을 선호하며 그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 먹이/화학물질 감지 (주화성): 지렁이는 토양에 있는 유기물(낙엽, 썩은 식물 등)의 화학적 신호를 감지하여 먹이가 풍부한 곳으로 이동합니다.
2. 주요 이동 목적
지렁이는 목적지나 경로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환경 자극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 먹이 찾기: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유기물이 풍부한 토양을 향해 이동하며 섭취합니다.
- 번식 (짝짓기): 비가 오는 등 흙 밖 환경이 습할 때는 천적의 활동이 뜸하고 몸이 마르지 않아 안전하므로, 짝짓기를 위해 땅 위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호흡: 폭우로 땅속에 물이 가득 차 산소가 부족해지면, 숨쉬기 위해 일시적으로 지상으로 이동합니다.
결론적으로, 지렁이의 움직임은 미시적인 환경 변화(빛, 습도, 화학 신호)에 따른 즉각적인 반응이며, 이 반응들이 모여 생존과 종족 보존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출처: 일반 생물학 및 동물행동학 관련 과학 교육 자료 및 백과사전 내용 종합
< Previous
다음글이 없습니다.